약 반년 전 읽게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는 여전히 충격적인 소설로 기억합니다.
한강 작가의 정보나 책의 내용에 대해 일체 찾아보지 않고, 단지 채식주의자 작가로만 기억하다 보니, 다른 책이 궁금하면서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작가의 강렬한 문체와 날것같은 표현, 순식간에 이야기에 빠지게 되는 흡인력 등은 이전 작품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 다음 작품 또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읽어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광주 민주화 사태를 겪은 세대의 작가가 실제 피해자들의 이야기들을 짜임새있게 구성한, '상당한 사실에 근거한' 약간의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의 픽션 소설 입니다.
어떠한 내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충격적인 도입부가 시작 됩니다. 화자가 주인공을 너라고 지칭하며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배경을 묘사하며, 중3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하려 합니다. 너무나 참혹한 광경은 무미건조한 듯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시취가 느껴지는 잔혹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첫 챕터는 대화 내용 또한 따옴표 없이 문장으로 나열하여, 문구가 상당히 속도감이 있으면서도 장면 묘사와 함께 긴 호흡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듯 합니다. 세세한 장면 및 인물 묘사로 인해 순식간에 이야기에 몰입하게 됩니다.
몰입하면서도, 특이하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습니다. '~~~ 너는 들었다', '~~~~너는 생각한다'와 같이 주어가 문장 처음이 아니라 중간에 위치하면서, 의도적으로 도치한 것으로 보이나,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나 그 당시 문학 작품의 한 표현법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중3의 일상에서 벌어진 사건의 기억은 충격적입니다. 의도적으로 어린 소년의 경험으로 광주사태를 설명하는 것은, 친구와 배드민턴을 치는 일상에 죽음이란 현실을 맞닥뜨리게 합니다. '군인이 무섭지, 축은 사람들이 뭐가 무섭다고요'하는 말은 시체 옆에서 중3이 허세도 아닌 담담한 어조로 말할 내용이 아닌 것이지만, 역사라는 사실 자체가 그 내용을 믿게 만들어 버립니다.
꿈보다 무서운 생시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친구를 두고 온 죄책감은 어린 소년의 엄청난 부담을 직설적으로 표현 합니다. 어쩔수 없는 죽음을 봤음에도 여전히 죄책감을 억누르지 못합니다. 충격적인 사건의 기억과 현재의 잔혹한 장면이 교차로 묘사되며 사건의 긴박함과 혼란을 생생히 전달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유가족들이 소문에 의지해 가족을 찾는 것은 전쟁의 참혹함 그 자체로 보입니다.
정신없이 읽은 첫 장을 이후, 2장부터는 화자가 바뀌어 다른 형태의 어조와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상당히 비현실적인 상황을 묘사함에도, 마치 그 비현실을 목격하는 듯한 표현이야 말로 한강 작가의 문체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스로의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 추억을 더듬는 것이, ~~했어 하는 어투로 설명되니, 실제 피해자의 입장이 더욱 이입되는 듯 합니다.
그 이후에도 각 장은 새로운 인물들의 시점으로 같은 사건을 복기 합니다.
그 참혹한 과거의 기억과, 남아있는 자들의 슬픔, 원통함이 피해자들의 일상을 망가뜨리며, 괴롭힙니다.
그러한 고통을 느낀 후 가담자의 관점 이야기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고 책을 멈추게 합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이 고통을 고스란히, 아니 어쩌면 아주 일부만을 전달하는데도 이렇게 고통스럽게 느끼도록 한 작가를 원망하게 될 정도입니다. 몸이 사라져주기를 빈다는 건 어떤 느낌인걸까. 상황을 이해하고 싶다는 갈망은 얼마나 한스러운 걸까. 또 다른 관점의 10년 후 기억들은, 간접적인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그 상흔이 얼마나 강렬했으며 큰 트라우마를 남기는지 보여줍니다. 사건은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언급되는 고문의 형태는 사실 여부를 떠나 오금을 저리게 한다. (하지만, 실제 그랬을거라는 두려움으로 사실 조차 확인하기가 무섭습니다.) 과연 난 견딜 수 있었을까. 그런 짓을 한 사람들이 과연 같은 사람인걸까. 당한 사람들은 어떤 심정일까. 단순한 피해에도 거품을 물고 싸우는 사람들인데, 정작 얼마나 두려웠기에, 기억 하는그 것 조차 부정하고 오히려 더 숨게 되는 걸까, 2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그 고통의 기억은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참변을 당한자, 죽은자, 도움을 주고 현장을 빠져나가 살아 남은자, 현장에서 살아 남아 고문을 받은 자, 또 다른 살아남은 자로서 고문 후유증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 그리고 첨변을 당한 자의 가족.
30년 후에도 가족을 갈라치게 만드는 그 슬픔은, 이해할 수조차 없는 상처입니다. 한없는 슬픔은 근원없는 연계성에 빠져들며 현실을 부정하려는 부질없는 생각의 고리에 빠지게 됩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아름다운 한글의 단어들(부세부세, 깨금발, 우렁우렁, 성근 터럭들에, 어른어른, 사위어가는, 거스러미, 까무룩, 싸묵싸묵, 아슴아슴, 겅중겅중)과 묘사되는 잔혹한 현실은, 차라리 소설이 아예 허구의 이야기를 바라게 될 정도 입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사투리는, 도저히 한 번에 읽을 수가 없을 정도로 먹먹했습니다. 맑은 날 주말 저의 아이가 노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책을 덮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을 근접하게, 그래도 사실에 가깝게 지은 것이라, 마음 한편으로는 그래도 어느 정도 픽션이라고 부정하고 싶었던 마음은 에필로그에서 철저히 부정당했습니다. 실제 피해자의 이름과 가족, 그리고 그 배경 조차 작가가 살았던 곳이란 사실이 더욱 무서워습니다. 책으로 읽기만 해도 이런데, 실제 작가의 마음은 어땠을까. 실제 피해자들은, 당사자들은 어땠을까. 조사를 하면서 악몽을 꿨다는 것이 괜한 것이 아니리라. 저 또한 그 사건을 제대로 인지하고, 잊지 않아야겠단 다짐을 가게 되었으니...
숨겨진듯한, 부정당한 듯한 역사적 사실을 소설의 형태로 재현한 무서운 소설이란 생각 입니다.
광주사태에 대해 궁금하시거나,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끼고 싶다면, 꼭 읽어 보시길 추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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